김현두 목사(세계로선민교회 담임) 저서 「구원은 영원한가?」(265-273p 인용)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을 경외함으로 걸어가라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은 성도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여 구원을 지켜내라는 말씀이 아니다. 성도에게 구원을 지키는 책임을 떠넘기는 말씀이 아니다. 성도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도 없고, 그 구원을 지켜낼 능력은 더더욱 없다. 구원과 지키심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본절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구원의 길을 감사함과 경외함으로 걸어가라고 권면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입증한다.
1.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성도가 구원을 이루어내라'는 뜻이 아니다.
1)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예수께서 구원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불가능함을 나타낸다. 구원은 무능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나타내셨다. 곧 구원은 전능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4-26).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2)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성도가 구원을 이루어내라'는 뜻이 아니다.
앞의 마 19:24-26에서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구원을 이루어내라"고 말할 수 없다. 바울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것이다.
바울은 본절 바로 앞 10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10)셨다고 말하여, 성도가 예수께 스스로 무릎을 꿇어 구원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하여 구원하셨음을 나타냈다. 곧 항상 비진리로 향하고 있는 성도를 구원한 것은 성도 스스로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강제로 되는 것임을 증거한 것이다.
바울은 또 11절에서도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1)고 말하여, 모든 성도들이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 것은 성도가 스스로 고백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강제로 하게 하셨음을 증거했다. 여기서 강제로 하셨다는 건 무생물적 강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감동과 깨달음을 주심으로 지성적으로 동의하도록 은혜를 베푸심으로 구원하셨음을 말한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시인하여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구원은 성도 스스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가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10,11절에 기록한 바울이 12절에서 "너희가 구원을 이루어내라"고 할 리가 만무하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성도가 구원을 이루어내라'는 뜻이 아니다.
2. 구원에 관해서는 평안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성도는 다시 그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셨는데 구원받은 자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때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하신다." 언뜻 보기에 이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말은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이 성도를 처음 구원하실 때 이미 죄인인 줄 아시고 구원하셨다. 곧 하나님은 악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이지 죄를 짓지 않는다면 구원하실 필요가 없다.
구원이라는 말은 건진다는 말로서 죄와 마귀와 세상에서 건지심을 의미한다. 또 성도는 연약하기 때문에 구원받기 전에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종말까지 계속 죄를 짓는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연약성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구원하실 때 종말까지 계속 용서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실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하시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죄를 졌지만 이제 구원하고 나면 죄를 전혀 안 짓겠지. 내가 그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했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일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그 은공을 잊어버리고 어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십자가의 피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나는 비록 제자들에게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한없이 인내하고 용서하지 않는다. 만일 구원받은 후 여러 번 반복하여 죄를 짓거나 또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구원을 취소하고 영원히 지옥에 던져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죄를 짓지 않을 것으로 믿고 구원하신 게 아니다. 또 성도가 죄를 짓고 나면 반드시 회개할 것으로 믿고 구원하신 것도 아니다. 성도가 틀림없이 죄를 지을 것과 또 그 죄를 일부만 회개하고 거의 대부분을 회개할 수 없음을 아시고 구원하셨다.
성도가 죄를 졌을 경우 회개할 때도 종종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만 가지 죄 중에 몇 가지만 깨달을 수 있으며,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신 후에도 계속 용서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구원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구원하신 후에도 계속된다.
본문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성도에게 구원을 이루어내라는 것이 아니며, 한 번 받은 구원을 종말까지 지켜내라는 명령도 아니다. 곧 구원을 지키지 못하면 다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협박이 아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살라는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며, 이미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을 위해" 성도가 두렵고 떨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구원에 관해 염려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곧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또는 '다시 지옥으로 버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고 염려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 다시 말해 구원에 관한한은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것을 반대하신다. 오히려 구원에 관해 담대한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며, 평안과 확신으로 살기를 다음 말씀과 같이 원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서 지키시리라(살후 3:3).
하나님은 구원을 취소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해서는 평안해야 한다.
3.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격이다.
바울은 본 12절에서 성도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하기에 앞서 8절에서 예수께서 먼저 "복종"하셨음을 말하였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곧 먼저 예수께서 "복종하셨으니"(8)라고 말하고, 성도들에게 "복종"(12)하라고 한 것이다.
앞 8절의 "복종하셨으니"(5255 휘페코오스)는 본 12절의 "복종하여"(5219 휘파코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같은 의미이다. 곧 예수께서 하나님께 복종하심과(8) 성도가 복종하는 것은(12) 같은 뜻이다.
바울이 예수께서 복종하셨음을 먼저 소개한 이유는, 예수께서 복종하신 것같이 성도들이 복종해야 함을 말하고 싶어서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혹 자기를 버리실까봐, 또는 지옥에 보내실까봐 무서워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공포감을 느껴 "두렵고 떨림으로" 산 적이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이 자기를 미워하거나 버리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신 적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복종은 공포와 의무적 복종이 아니다.
예수님의 복종은 거룩한 인격에서 나오는 복종이다. 하나님을 지극히 믿고,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다. 곧 경외함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종은 신뢰와 존경과 사랑과 평안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모본이다. 성도는 예수님을 닮는다. 예수님이 아들이신 것처럼 성도들도 아들이다.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아들인 성도도 버리지 않으신다.
본절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12)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신 마음과 같은 표현이다. 예수님처럼 성도가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을 나타낸다.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실까봐, 또는 지옥에 보내실까봐 공포심으로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사신 게 아닌 것처럼, 아들인 성도도 아버지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하고 지옥에 보내실까봐 무서워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인격으로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격이다.
4.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너희 구원의 길을 경외함으로 걸어가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식장에서 신부가 신랑을 향해 입장할 때에 예전에 입던 헌옷을 입고 나아갈 수도 있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아갈 수도 있다. 어떤 옷을 입더라도 신랑과 결혼하는 것은 변함없다. 그러나 가능하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아가면 신랑이 기뻐한다. 신랑은 신부가 이왕이면 아름답게 입장하기를 바란다.
신부는 입장할 때에 혹 "내가 저 앞에 있는 신랑에게 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또는 "저 신랑이 나를 버리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걸어가지 않는다. 신부는 신랑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간다. 혹 드레스가 더럽혀지거나 자세가 흐트러질까봐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신부는 "두렵고 떨림으로" 그 웨딩 길을 걸어간다.
신부의 두려움과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정결함과 아름다움과 존경, 곧 경외함이다. 신부는 결혼의 길을 경외함으로 걸어간다.
이와 같이 본문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너희 구원의 길을 경외함으로 걸어가라"는 뜻이다. 본절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신 너희 구원의 길을 항상 경외함으로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걸어가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경외함으로 너희 구원의 길을 걸어가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의 길을 경외함으로 걸어가라"
출처 : 기독교연합방송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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